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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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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삼중제국 === 위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과 별개로 [[1880년대]]에 태동하여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제 [[카를 1세]]의 지지도 받았던 재편성 계획으로는 [[https://en.wikipedia.org/wiki/Trialism_in_Austria-Hungary|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일명 삼중제국 재편성 안이 있었다. 삼중제국은 과거 헝가리인에게 동등한 주권을 주었듯이 동등하지만 제한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에게 완전히 동등한 주권을 줘서 제국의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이었다. 이뿐 아니라 카를 1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갈 무렵 체코와 폴란드인이 다수 거주하는 [[갈리치아]]에도 동등한 주권을 부여하는 오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체코-갈리치아]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파일:삼중 제국 제안안.png]] 크로아티아의 영토에 슬로베니아와 보스니아, [[이스트리아 반도|이스트리아반도]] 전역을 포함시키자는 제안안 [[파일:제안안2.png]] 당시 크로아티아의 영토에 이스트리아반도의 일부와 보스니아만 포함시키자는 제안안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안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개인의 이상에 불과한 데 반해 삼중제국 안은 1880년대부터 존재하여 [[오스트로슬라브주의]] 세력의 지지와 추후에는 황제의 지지까지 받았던 안이었지만 제국 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헝가리 왕국]]의 반대로[*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인]]에게 원한이 깊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인이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싫어했다. [[칼만]] 왕 이래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동군연합]]이었으나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독립하려 할 때마다 크로아티아인이 선봉으로 나서 헝가리의 독립 시도를 진압했기 때문이다. 당장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크로아티아인]] 총독 [[요시프 옐라치치]]였다.] 번번히 미뤄지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망이 다다른 [[1918년]], 크로아티아인들이 지지 의사를 철회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어떻게 보면 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안의 선배이자 실현에 더 가까웠던 안이지만 비슷하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산된 개편안이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만약에 승전하여 제국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삼중제국은 실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면 삼중제국 개혁안 역시 대타협과 다를 바 없이 지배자가 하나 더 늘어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제국에는 크로아티아인 외에도 여러 피지배민족들이 있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민족주의 세력 역시 강해질 것을 생각하면 삼중제국이 실현되었어도 계속 안정적으로 굴러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크로아티아인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훨씬 강했던 체코인은 자신들에게도 크로아티아와 동등한 지위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카를 1세]]가 마지막으로 던진 승부수였던 오중제국에는 [[보헤미아 왕국]]과 [[모라비아 변경백국]]에 대한 포괄적인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체코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치적 기반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작위인 보헤미아 왕위의 기반이기도 하며 [[30년 전쟁]] 이전까지는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이후 [[오스트로슬라브주의]]에 입각하여 자치권을 강화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원한이 깊었던 합스부르크 왕조 군주들은 대대로 이를 무시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보호 속에서 자치를 요구하는 것을 긍정했던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가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3가지였다. 자신들의 청원이 황제가 보기도 전에 폐기되었다는 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어떤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한다면 체코인도 똑같이 패전국의 전범 신세로 전락한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김지영-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이후 동유럽 민족 국가의 성립) 다만 합스부르크 왕가 입장에서도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들어주면 제국 내 타 슬라브 민족들이 자치를 요구할 것을 우려하여 무턱대고 보헤미아 왕국의 자치를 허용하기 난감했다. 무엇보다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들어주면 헝가리 왕국 내 타 슬라브 민족이 궐기할까 우려한 헝가리인이 체코인의 자치 요구를 반대했던 점도 있었다.(동유럽사-존 코넬리) 실제로 합스부르크 왕조 내에서 굳이 체코인을 콕 집지는 않았더라도 슬라브 민족의 자치와 주권을 존중하고 허용하려 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슬라브인에 대한 자치 문제로 헝가리 왕국은 물론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도 배척당했다. 문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가브릴로 프린치프|하필 슬라브 극단주의자]]'''에게 사라예보 사건으로 허망하고 갑작스럽게 암살당하고 그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체코(보헤미아 왕국)의 공존 가능성은 사라졌다. 때문에 삼중제국 개혁안은 실현되었어도 [[유고슬라비아 왕국]] 형성 직전의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처럼 다음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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